글쓰기 활동

요양원에 계신 고모님께

세상과 연애하다 2023. 1. 28. 18:15

고모님!

설 명절을 앞두고 고사리나물을 하다말고 고모 생각에 눈시울을 적십니다. “우리 홍자는 나물을 좋아해서 여러 가지 했다. 특히 너 좋아하는 감주를 많이 만들었. 언제 올래?” 명절 앞이면 어김없이 전화하셔서 언제 올 거냐고 채근하시던 모습이 떠올라 나물을 볶다 말고 요양원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고모, 홍자야”. “응”. “홍자가 누구야?”. “내 조카 딸”. “얼굴 기억 나?”. “응, 언제 와?”. “언제 와” 만 반복하시는 나의 고모님!

 

내 소중한 고모님이 치매로 요양원에 가신지 벌써 2년 2개월이 되었네요. 올해 춘추 78세이신데. 가물가물 꺼져가는 흐릿한 촛불처럼 겨우 목에서 끄집어내는 듯 한 힘없고 가느다란 목소리!

 

요양원에서 하염없이 저를 기다리고 계실 고모님을 생각하며 그리움의 눈물과 함께 못다 한 속 얘기를 편지를 통해 전합니다. 그동안 베풀어 주신 한없는 은혜를 어찌 몇 줄의 글로 표현할 수 있으랴마는, 인간사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모아 책으로 엮는다는 원고 청탁을 받고 고모님의 특별한 조카 사랑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으려 합니다.

 

“홍자, 네 고모 같은 사람은 대한민국에 한 사람도 없을 거야” 친구들 얘깁니다.

“엄마, 고모할머니가 결혼 전에 혹시 엄마를 낳아서 외가댁에 맡기고 시집가신 거 아니야? 고모가 어떻게 조카를 그리 사랑할 수 있지?” 딸들의 예기치 못한 질문입니다. “고모 얘기는 그만 해. 올케들이 싫어하거든” 남동생들의 얘기입니다. 주변에 다양한 화제 거리로 회자 되지만, 오직 나만이 당신의 깊은 사랑을 알고 그 은혜를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답니다.

 

사랑하는 고모!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70년대 배고픈 그 시절. 고모부의 적은 월급으로 고모네 다섯 식구 생활하기도 어려운데, 남의 집 셋방에서 시동생들 공부시키며 푼돈 부업으로 반찬값 버시느라 하루 종일 일하면서, 주말이면 찾아오는 조카 딸 배 곯았을까봐 신문지에 돌돌 말아 찬장 구석에 숨겨 둔 노랗게 말린 누룽지. “홍자야, 이거 먹어라. 배고프지 않았니?” 지금 생각하면 고모 나이 30대이신데 벌써 고모는 깊은 어른이어요.

 

우리 속담에 “인장지덕人長之德 목장지폐木長之弊” 라는 말이 있지요. “사람은 큰 사람 밑에 있으면 덕을 보고, 반대로 나무는 큰 나무 밑에 있으면 피해를 본다.”는 뜻으로 사람은 큰 사람 덕을 볼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요. 고모는 내게 그런 큰 어른이셨습니다.

 

저는 엄격한 유교 집안의 6남매 중 맏 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장남이고, 제가 큰 딸이니, 집안의 장손녀지요. 제가 태어났을 때 증조모, 고모들도 함께 4대가 살았습니다. 한때는 잘 살았지만, 평생 책만 읽고 사신 훈장 선생님이신 할아버지와 몰락한 양반가의 체면을 유지하기 버거우셨던 아버지, 늘 병석에 누워 계신 어머니, 그리고 젖먹이 막내까지 6남매. 가세는 급격히 기울어 꿈 많던 학창시절은 중학교 1학년을 끝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살림 밑천의 딸 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자손이 귀한 집안의 장손녀의 위치는 남아(男兒) 선호사상이 짙던 그 시절에도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한 자리였지만 가난 앞에서는 또 다른 삶의 무게였습니다. 먹고 자는 일만 해결되면 그것도 감사한 일이라 생각하고 상경하여 가방공장, 봉제공장을 다녔지만, 그야말로 기숙사비 내고 나면 월급 없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고모님 내외의 도움으로 삼성전자에 입사를 하게 되었고, 그 후부터 고모님 댁 반경 2km 주변을 맴돌며 청소년기를 보내게 되었답니다. 생활기반을 마련한 후에는 ‘배워야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다’는 저의 신념 때문에 동생들 학업을 위해 데려왔지요. 세 살 터울 첫째 남동생은 수원공고에 입학시키고, 다섯 살 터울 둘째 남동생은 초등학교 5학년에 전학시킨 바람에 저는 소녀 가장이 되어 고모 주변에서 맴돌았으니, 얼마나 부담이 되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도 그리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고모님의 큰 사랑 덕분입니다. 고모님의 후광이 아니었다면 어림없는 일이라는 걸 지금도 잘 알고 있습니다.

 

결혼해서 살아보니 친정 식구가 주변에 있으면 심적(心的)으로 많은 부담이 되던데, 고모님은 어떻게 어린 조카들을 가슴으로 품고 사랑해 주셨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콧등이 시큰합니다. “ 우리 홍자 반만 닮아라.” “ 우리 홍자여, 내 조카 딸” 주변에 얼마나 자랑을 하셨던지, 수원시 지동에 사는 고모네 이웃들은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누가 묻지 않아도 저의 자랑을 늘어놓는 고모님 사랑 덕분에 저는 늘 용기를 얻었답니다. 힘들고 지쳐 삶을 원망하고 주저앉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던 힘은 고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한 저의 몸부림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주경야독도 저에게는 사치였어요. 야경주독을 해야 생활비를 더 벌면서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아침에 퇴근을 해야 동생들을 돌보며 살림을 할 수 있었으니 밤낮없이 노력하는 조카딸이 안쓰러워 자랑으로 위로를 삼으셨던 모양인데, 저는 그게 고모의 낙(樂)인 줄 알았었지요.

 

제가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 검정고시를 합격 했을 때도, 첫째 동생이 경기도 공무원 시험을 합격 했을 때도, 둘째 동생이 직업군이 되었을 때도 고모는 들뜬 목소리로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우리 조카”들이라고 치켜세우셨지요. 고모님의 의기양양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시집가서 대접받으려면 친정에서 생일상 받아야 한다고 결혼하기 전에 친구들 초대해서 생일상 차려 주시던 그 모습도, 조카 딸 결혼식에 당신이 함을 받겠다고 이것저것 장만해서 새신랑을 맞아 주시던 그 모습도 엊그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합니다. 당신의 넓고 크신 사랑의 힘이 가난한 어린 조카들에게 토양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음을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고모님!

당신이 침이 마르도록 자랑스러워하던 조카 딸 홍자는 대학원을 마치고, 경기도 의원을 거쳐 안양시청소년재단 대표이사로 봉직하며 사회생활을 나름 성공적으로 했니다. 올망졸망했던 제 동생들도 공무원으로, 직업군인으로, 경찰 간부로 성장해서 인정받는 사회인이 되었답니다. 되돌아보면 고모님과 고모부는 가까이서 정신적 부모역할을 해 주셨던 것이지요. 저를 낳아 주신 부모님이 생부생모라면 고모고모부는 양모양부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친자식처럼 변함없이 평생을 사랑해 주신 거라 믿습니다.

 

그런데 그 고마운 고모님이 치매에 걸렸습니다. 얼굴만 보면 ‘밥 먹고 가라’시던 분이 밥 차리는 걸 잊어버렸다고 굶고 계시고,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갔다 다시 돌아와 현재를 섞어 말하니 전혀 알아들을 수 없어 참으로 안타까웠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고모님은 요양병원으로 모셔졌지요. 고모님이 요양병원에 가신 날. 2018년 12월 31일 늦은 저녁. 저는 아직도 그날을 기억합니다. 요양병원으로 모셨다는 전화 한 통을 받고, 숨이 딱 멎는 듯한 가슴 통증을 느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체, 깊은 슬픔에 빠져버렸지요. 그리고 밤새 흐느꼈던 그 밤. “ 우리 홍자 어디 있니? 나 여기서 꺼내 줘. 나 집에 데려다 줘” 외쳤을 것 같은 고모님의 목소리가 환영처럼 귓전에서 떠나지 않던 그 날 밤을 잊지 못합니다.

 

아직은 치매 초기인데 그렇게 빨리 요양원으로 보냈는지 이해 할 수 없어 저는 고모부와 그 가족들을 원망했습니다.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던 고모부도 싫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모부와의 관계도 소원하게 되었지요. 가끔 안부 전화는 드렸지만 찾아뵙지는 안 했습니다. 냉랭하게 변한 조카 딸 모습에도 고모부는 한 결 같이 당신은 괜찮으니 걱정 말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줄만 알았습니다.

그러다 청천벽력 같은 일을 당했습니다. 정정하시던 고모부께서 2020년 12월 17일에 돌아가셨습니다. 고모님을 요양원에 맡기시고 2년 만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동안 고모부께서는 지병을 앓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고모님을 돌보시지 못해 부득이 요양원에 맡기셨던 것인데, 아무도 고모부 지병을 몰랐으니 오해 할 수 밖에 없었지요. 과묵하시고 따뜻하신 저희 고모부는 모두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외로운 시간을 혼자 견뎌내셨던 것입니다. 저는 고모부와 그렇게 이별하게 되었습니다. 서운한 마음을 코로나를 핑계로 찾아뵙지 않은 지난 1년을 후회하며 옹졸했던 제 자신을 한없이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고모님을 찾아뵙지 못한 지도 벌써 1년이 되어 갑니다. 고모님은 고모부가 세상을 떠나신 지도 모릅니다. 소식을 전하지 않았으니까요. 오로지 고모부만 기다리실 고모님을 생각하면 또 다른 아픔이 밀려옵니다. 고모님을 두고 눈을 감지 못했을 고모부님을 생각하면 그 또한 가슴이 저며 옵니다. 세상살이가 그런가 봅니다. 어버이 살아 계실 제 섬기기를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닮다 어이 하리! 두 분을 생각하면 제 마음이 참으로 애닮습니다.

 

저는 고모님께서 보살펴 주신 덕으로 건강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그동안 다양한 공직에서 소임을 다하고, 지금은 노년을 아름답게 살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의 보금자리를 자처하며 여러분들과 힘을 모아 “바비레따” 라는 법인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어려움은 있지만 사태가 진정되면 그동안 쌓아온 노력의 결실이 있으리라 기대하며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고모님 곁에 있던 어린 조카 딸 모습으로 여전히 열심히 노력하며 지냅니다. 치매에 걸려서도 똑같은 목소리 톤으로 “우리 홍자”라고 말씀하시는 우리 고모님! 오늘이 있기까지 항상 보살펴 주신 고모님을 그리워하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천상에 계실 고모부님께도 참회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고모부! 사랑했어요. 혼자 남겨진 고모님을 자주 찾아 뵐 테니 너무 염려 마세요.

“언제 올 거냐?”는 말씀만 되풀이하시는 치매 걸린 우리 고모님! 사랑합니다. 하루빨리 코로나가 종식되어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하며, 부디 살아 계시는 동안에 평안 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고모님!! 사랑합니다.

 

                                                                    2021년 신축년 입춘지절 조카 홍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