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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담(池淡)정홍자
경주 최 부자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본문
얼마전 경주 최부자집을 다녀왔습니다.
최부자집 철학과 가훈, 인간애를 같이 공유하고 싶어 글을 쓰려는데
옹달샘이라는 블로그에 정리를 잘 해 놓으셨네요...
그래서 펌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같이 공유하면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해서요...
이 시대 이런 부자를 기다리면서.........
12대 400년 이어온 경주 최 부자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지금까지 이런 부자는 없었다!
12대(代), 400년간 지속된 부(富)!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천!
경주 최부자,
그 부(富)의 비밀을 파헤친다.
▲ 마지막 최부자 최 준.
1. 스웨덴 국왕이 찾은 식민지 조선의 명문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지난 1951년.
스웨덴 의료 참전단의 간호사들이
경주 교동 최부자집을 찾았다.
그들은 곧 최부자집 안채와 부엌 곳곳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이들은 스웨덴 국왕 특별명령을 수행중이었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6세.
그는 황태자였던 1926년 황태자비 루이즈와 함께
신혼여행길에 식민지 조선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구스타프는 일본이 자행한 신라시대
고분 발굴에 참여하게 되고이 고분은 그를 기념하는
뜻에서 스웨덴의 한자식 발음을 빌어
'서봉총'으로 이름지어졌다.
그리고 황태자부부는 당시 경주의 한 고택을
방문한다.
이들은 전통음식으로 뜨겁게 환영해준
조선의 명문가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구스타프 6세는 간호사를 지원하며,
여성 전용공간이라 둘러보지 못한
최부자집 안채와 부엌을 촬영해오라 한 것이다.
구스타프 황태자에게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긴
식민지 조선의 기품있는 명문가.
12대 400년 동안 덕망으로 부를 지켜온
부자의 대명사, 경주 최부자였다.
흔히 부자 3대를 못간다는 말이 있다.
노력없이 물려 받은 부는 오래가기 힘들다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부자가 천국 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도 있다.
부자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주변의 인심을 얻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돈부자, 집부자, 땅부자...
요즘처럼 부자에 대한 말들이 많았던 시대는 없었다.
갈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양극화의 시대.
우리는 경주 최부자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
2. 죄부자집의 가훈들 - 더불어 사는 상생의 삶.
경주 최 부자.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경주 교동 69번지.
이곳에 12대 400년간 부를 이어온 경주 최부자집이 있다.
최부자집은 사랑채, 안채, 사당 등
영남 북부의 양반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970년대 화재로 불타 주춧돌만 남았던 사랑채는
최근 그대로 복원한 상태다.
특이한 점은 사랑채와 안채를 완전히 구분해,
안채로 들어가기 위해선
또 하나의 대문을 통과해야 된다는 점이다.
대지 2천평에, 1만여 평에 이르는 후원,
이 집에 살던 노비 숫자만 100여 명에
이르렀을 만큼 규모가 큰 집이다.
눈에 띠는건
마당 한 켠에 800석을 쌓아올릴 수 있다는 창고다.
이 집이 최 부자 집이라 불리는 이유를
짐작케 하는 창고.
그러나 최부자집의 명성은 단순히 부
의 규모때문만은 아니다.
예로부터 '활인당'이라고 불리던 특별한 곳이 있다.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활인당터.
이곳에서도 최부자집의 명성의 유례를
짐작할 수 있다.
"교리 최부자 그분네들이
사방 100리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죽을 끓여
굶주리는 사람들 생명을 유지케 한 자리입니다."
~ 최상춘(경주 내남면, 69세) ~
<br>
▲ 최부잣집의 곡식창고 최씨 일가는 이곳
활인당 터에서이웃들에게 죽을 쒀 나눠주었다.
때는 16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남에 흉년이 돌면서 굶어죽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당시 최부자는 사옹원 참봉을 지낸 그는
과감히 곳간을 헐었다.
최국선의 행장에는 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기록들이
남아있다.
"많은 사람들의 굶주림이 이 지경에 되었는데
어찌 집안재물을 아껴 저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겠는가?"
배부른 자가 배고픈 자의 절망과 공포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 점에서 최부자집은 여느 부자집과 달랐다.
풍년의 기쁨을 함께 누리면
흉년의 아픔 또한 이웃과 함께 감수하는 것이
부자의 도리라 믿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사방 100리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유명한 말이 생긴다.
부자들에게 흉년은 재산불리기에 절호의 기회였다.
형편이 다급한 농민들은 굶어죽지 않기 위해 헐값에
농토를 내놓았다.
이렇게 사들인 논을 흔히 '죽빼미논',
또는 벼 한 섬으로 샀다고 해서 '한 섬 논'이라 불렀다.
그러나 최부자집은 부자들의 삶의 방식과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최국선(1631~1682)의 무덤 비문에는
또 다른 최씨 집안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사람들이 어렵고 급한 사정으로 공에게 담보 잡힌
문서들이 책상 가득하였다...
공이 문서를 태워버리고 더 이상 묻지 않으니..."
각종 담보 잡힌 사람들의 문서를 모두 불태움으로써
담보 잡힌 사람들의 불안을 덜게 해준 것이다.
"갚을 사람이면 이런 담보가 없어도 갚을 것이고
안갚을 사람이면 이런 담보가 있어도 갚지 않을 것이다."
최부자집에는 "흉년에 땅을 사지 마라!"는 또 하나의
가훈이 있다. '재산증식의 도덕성'을 강조한 것이다.
"적어도 조선시대에 진정한 선비, 진정한 양반들은,
'우리 모두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공동선의식(共同善意識)'이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내가 잘 살려면 형제, 이웃 사촌들이 다 잘 살아야 한다,
이런 논리가 경주 최부자집의 논리 같습니다.
이웃이 편해야 내가 편하지,
이웃이 불편한데 내가 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최해진 교수(동의대 경영학과)
이런 전설같은 이야기는 경주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주 청풍루는 원로 유림들이 모이는 곳이다.
"경주 최부자집하면
'만 석 이상 하지마라!'는 가훈이 전해집니다.
최부자집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독특한 재산운영 방법입니다."
- 이종택(경주시 성근동 76세)
토지가 좁은 영남지방에서 만 석 이상의 소작료는
필연코 무리가 뒤따라 누군가의 원성을 살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소작료를 만 석으로 고정하자
땅이 늘면 늘수록 최부자집의 소작료는 낮아졌다.
최부자집이 부유해지면
소작인의 곳간도 덩달아 불어나는 독특한 경제 형태였다.
이른바 '상생의 경제'였다.
그래서 소작인들은 최부자가 더 많은 땅을 가지길 바랬고
팔 땅이 있으면 앞다투어 최부자집에 알렸다.
"소작인들한테 돌려줌으로써 소작인들도 함께
부유해지고, 서로 안정적으로 부를 유지함으로써
장기적인 안목으로 봤을 때 더 크게 발전할 수 있는
독특하게 재산운영을 했습니다.
즉 '적정이윤이 극대이윤보다 더 유리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전진문 교수(영남대 경영학부)
안정적인 부를 유지하고 지역사회 신망을 얻자
전국 각지의 손님들이 최부자집 사랑채를 드나들었다.
그것은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는 최부자집의 독특한
철학때문이었다.
숙박시설이 많지 않던 시절.
최부자집은 길손들에게 최고의 숙박처였다.
많게는 하루 백여 명이 넘을 정도였다.
당시 최부자집에는 특별한 뒤주가 하나 있었다.
사랑채에 손님이 넘치면,
이 뒤주에서 쌀 한 줌과 과메기 한 마리를 가지고
하인집이나 소작인집으로 가면,
최부자집 손님인 줄 알고 밥을 지어주고 잠자리도
제공해주었다.
손님을 접대하는 하인이나 소작인들은
소작료를 내지 않는 특권을 주었다.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손님은 독상으로 대접했다.
최부자집이 직접 지배한 미역과,
인근 특산물인 과메기가 기본 반찬이었다.
이것은 손님접대 이상의 결과를 가져왔다.
손님을 차별없이 접대해 인심을 얻고
동시에 폭넓은 지식과 문화교류를 통해 다른 지방의
정보를 얻었다.
더 풍요롭고 다채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한 것이다.
또한 최부자집을 다녀간 사람들의 입을 통해
최부자집의 명망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재산축적의 정당성 확보와 과감한 나눔으로
신망을 얻어 장기적으로 부의 안정적 유지를 마련한
최부자집의 지혜였다.
"어렵고 힘들 때 이웃과 함께 하라!"
이것이 바로 최부자집의 명성을 널리 알리고
12대 400년간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3. 최부자 그들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경주 최부자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경주 내남면 이조리 <용산서원>.
최부자집의 중시조격인 최진립장군을 모신 서원으로
서원으로써는 드물게 무인을 향사하고 있다.
용산서원은
숙종 37년 임금이 친히 '숭렬사우(崇烈祠宇)'로
사액하여 사액사당으로 출발했다.
당시 무신으로 사액사당을 받은 곳은
이순신과 김시민장군뿐일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곧이어 최진립장군을 모신 <숭렬사>는
영남 사림들의 뜻을 모아 <용산서원>으로 승격했다.
"무인으로서 향사된 경우가 지극히 희귀합니다.
'숭명배청',
명을 숭상하고 청을 배척하는 시대논리는
최진립의 일생과 맞아떨어졌습니다."
- 정순우 대학원장(한국학 중앙연구원)
<충의당>
내남면 이조리, 경주최씨 정무공파 종가.
최진립이 살던 종가다.
최진립(崔震立, 1568~1636년)은 무반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종가에 보관되고 있는 최진립의 일대기
<잠아선조실기)>에는 그의 화려한 무공들이
기록되어 있다.
"공이 밤에 수십 명의 집안사람과 함께 문을 막고
불을 놓으니 적이 타 죽고 뛰쳐나오는 자 쏘아죽이고
조총, 창칼을 뺏어 관에 바쳤다."
- 최채량(75세, 최진립 14대 종손)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당시 경주로 들어가기 위해 이조리에 쳐들어온
왜구를 최진립은 밤에 급습하여 화공으로 물리친다.
이후 동생 최계종과
경주 인근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며 큰 공을 세운다.
그 공으로 무관직 병절교위 부장(교지)에 제수되
관직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정식으로 무과에 급제한다.
그후 서생포 전투, 도산 전투, 화왕산 회맹 등
영남 인근의 각종 전투에서 동생과 함께
큰 공을 세운다.
전쟁이 끝나자
선조는 최진립의 공을 높이 치하했다.
"임금(선조)은 최진립을 따로 불러
술과 활과 화살을 상주고 여도만호 겸
선전관에 임명하였다."
- <정무공실기>중에서
최진립은 경흥부사, 공조참판, 삼도수군통제사,
전라수사 등을 거친다.
1636년 청의 침입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당시 공주영장이었던 최진립은
충청감사 정세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정을
서두른다.
"임금께서 포위당하고 계신데 늙은 신하가 살기를
도모하겠는가.
내 비록 늙어서 장수가 되기는 부적당하나
능히 갈 수는 있소이다."
- <연려실기술>중에서
예순 아홉의 최진립은 임금이 계신 남한산성을
향해 군사를 몰아갔다.
그러나 전투는 중과부적이었다.
경기도 용인 험천전투.
조선군대는 청나라 철기병에게 패퇴했다.
모든 장수들이 퇴각했지만 최진립은 끝까지
항전을 결심한다.
"너희는 나를 따라 죽을 필요가 없다.
난 여기서 한 치도 떠나지 않고
싸우다 죽을터이니 너희는 그렇게 알라"
- <연려실기술>중에서
이미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1636년 12월 27일.
정무공 최진립은 그렇게 장렬히 순국했다.
이듬해 인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병조판서에 증직하고 정려각을 내렸다.
두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최진립에게
인조는 제문을 지어 그를 추모했다.
"국왕은 전 참판 최진립의 영에 고하노니
공은 동국의 인걸이라.
굳센 지조 내 공경하여 성심으로 제주를 보내니
죽지 않은 영혼 흠향 할지어다."
- '인조의 사액제문'중에서
<최진립 신도비>는
그의 추모 사업이 얼마나 거국적이었는지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높이 3미터에,
비를 받들고 있는 거북조각의 크기는 웬만한
무덤크기다.
거북 곳곳에 섬세한 조각은
조선후기 석조예술의 백미를 보여준다.
이 거대한 석조들은 울산 치술령에서 옮겨왔다.
더 의미있는 것은 신도비의 구성이다.
신도비의 발문은 노론 조명겸(趙明謙)이,
비문은 남인 조경(趙絅)이,
비의 음기는 서인 윤심지가 썼다.
서원의 현판은 당대 최고 서예가인 옥동(玉洞)
이서가 썼고, 서원기는 실학자 이익(李瀷)이 써서,
당쟁의 시대에 당파를 뛰어넘은
추모 열기를 보여준다.
비장한 최후와 북벌론의 대두로
최진립은 국가적 영웅으로 떠오르고
경주 최씨 정무공파는 명문가의
기틀을 닦게 된다.
1647년에 청백리로 뽑힐 만큼
청렴한 관리이기도 했다.
<br>
▲ 용산서원에 모셔진 최진립의 위패.
최진립이 사용하던 검.
4. 최부자, 그들은 어떻게 부자가 됐을까?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충신집안이
어떻게 조선 최고의 부자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을까?
<한국학 중앙연구원>에는
최근 발견된 최씨 집안의 고문서들이
보관되어 있다.
400여 년간에 최씨 가문에서 작성된 각종
문서들은 말로만 듣던 최부자집의
부 형성과정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것은
최씨 가문의 재산이 기록되어있는 1620년
'최진립 분재기'다.
30년 차이를 두고 있는
1651년 최진립의 아들 '최동량 분재기'를
비교하면,
최진립의 아들 최동량의 재산에서
노비보다 토지증식에 집중되었음을 보여준다.
"동량 같은 경우는 노비 8명을 분재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문서를 보면,
약 한 세대뒤인 30년후에
재산상속을 보여주는 것인데,
노비 8명이 40명으로
늘어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안승준 전문위원(한국학 중앙연구원)
전쟁후의 혼란기.
울산농소(蔚山濃所).
그의 땅은 이미 울산에까지 이르렀다.
형산강 유역의 경주 내남 이조리 들판.
경주의 대표적 평야지대다.
최부자집이 터를 잡은 형상강 상류지역은
전쟁이후 버려진 농토와 습지들이
널려 있었다.
양난 이후 피폐해진 경제를 복구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농토개간을 독려했고
최부자집은 이런 정책에 힘입어 이조리들을
경작지로 확보했다.
그리고 볍씨를 논에 직접 뿌리는 직파법 대신
모판에 모를 심어 이앙하는 '이앙법(모내기법)'을
도입한다.
'물꼬싸움'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앙법엔 물이
필수적이다.
물이 모자라면 옮겨 심은 모들이 말라버린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수리시설이 확보되지 않으면
이를 절대적으로
금지시켰다.
이조리들에는 수백년전 인공적으로 형성된
수리시설이 있다.
최부자집은 형산강 하류의 수리시설을 이어
중상류에도 농업용수를 확보한다.
1960년대까지만해도
최부자집이 '나무목으로 만든 인공수로'가
수백년을 이어 사용되고 있었다.
이양법의 보급으로 노동력은 1/10로 줄었고
모판에서 모를 키우는 동안,
논에서 보리를 키우는 이모작이 가능해지면서
생산력은 크게 증가되었다.
최부자집의 실학적 가풍은 또 다른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남대 도서관 <문파문고>.
최부자집이 조상 대대로 보관해온
7천여 권의 유명인사의 고서와 수십 권의
필첩을 기증해 특별히 따로 보관하고 있다.
이 필첩들은 그 양이나 연대로 봐서
조선 최고 필첩으로 부를 만한 학술적,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자료들이다.
그런데 여기에 정무공 최진립이
아들 최동량에게 쓴 편지가 한 통 있다.
집안 살림을 맡아 하던 아들에게 보낸 편지로
최진립의 인간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며느리의 옷을 지어주려하니 치수를 재어
적어보내라는 시아버지의 자상한 모습이
나타나 있기도 하다.
그런데 뒤이어 흥미로운 구절이 나온다.
"뒤 큰 논은 종들에게 나눠 짓게 하라."
무슨 뜻일까?
이 말 속에 최부자집의 또 다른
농업경영법이 들어있다.
"성과급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성과가 난 것은 노비가
나눠가진다,
요즘 '논내기'라고 말하는 것으로,
생산력 증대의 한 수단으로써 최씨 가문의
농업경영의 한 방법
이었습니다."
- 안승준 전문위원
그것은 경영 성과에 따라 종들과 이윤을
나눠가지는 방식으로 이는 노동의욕과
생산성을 높이는 자율적인 농업생산법이었다.
이것은 최부자집이 '마름'을 두지 않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당시 '마름'은 소작인들의 관리권을 쥔 사람으로,
소작인들에게 횡포를 부려 소작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최부자집은 중간관리인 '마름'을 배제하고
그 이윤을 소작인에게 돌려주었다.
"소작인중에 사정이 어려운 집이 있으면,
혹 병자가 있거나 혹은 부녀자만 있으면,
문중에서 의논을 하여 세를 많이 깍아주는것을
어릴 때 보았습니다."
- 최재량(14대 종손)
마름을 두지 않은 것은
소작료 인하와 더불어 부수적인 효과를 주었다.
지주와 소작인의 직접적 만남은
소작인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게 했고 지주의
신뢰를 받게 했다.
매년 음력 12월 27일밤.
정무공 최진립장군의 기제사를 지낸다.
이조리 정무공파 최부자집에서 이뤄지는 제사는
일 년중 가장 큰 행사로 아랫사람을 대하는
최부자집의 인간적인
가풍의 기원을 확인할 수 있다.
최씨 집안을 조선에서 일약 명문가 반열에
올린 최진립.
나라에서는 최진립을 영원히 제사지내는
불천위로 지정했다.
역대 국왕들은 네 번이나 사액제문을 보냈고
후손들은 수백 년째 그 뜻을 기리고 있다.
그런데 이 제사의 백미는 최진립의
제사를 끝내면서 다시 시작된다.
제사가 끝나면 그 제사상을 그대로 들고
나가 마루로 옮긴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제사가 이뤄진다.
놀랍게도 그것은 최진립을 모신 두 명의
종을 위한 제사다.
종을 위한 제사.
종손은 최진립과 두 종이 만나도록 촛불을
밝혀 이어준다.
옥동과 기별.
옥동은 임란때 최진립을 왜구의 칼날에서
구해내었고,
기별은 예순 아홉에 전쟁에 나간 최진립을
끝까지 따랐다.
"이미 주인이 충신의 길을 가기로 하였는데
어찌 충노가 그 뒤를 따르지 않겠습니까"
- <동경지>중에서
기별은 최진립과 함께 온 몸에 화살을 맞고
죽어간다.
"함께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조상과 다름없이 생각해서 함께 제사를 지냅니다.
주변에서 어떻게 양반가에서 종의 제사를 같이
지내냐고 말이 많았지만
우리들은 정무공과 일신(一身)이라 생각하면서
수백 년 동안 함께 제사지내오고 있습니다."
- 최재량 14대 종손
'충노불망비(忠奴不忘碑)'
주인을 위해 목숨을 던진 종을 위해
세상의 비난과 손가락질에도 굴하지 않고
종에게 머리를 숙일 줄 아는 양반가.
그것이 경주 최부자집안이 사람 대하는
기본자세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의 시작은 '아껴쓰기'
최부자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최부자집 며느리는 시집오면 3년간 무명옷만
입어야 했다.
옷을 덧대어 깁고 또 기워 입어서
치마 하나를 솥에 넣어 삶으면 서말치 가마솥이
가득찰 정도였다고 한다.
만석꾼 며느리도 보통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 이었다.
최부자집은 7대 최부자 최연경때
경주 중심 교동으로 이사를 한다.
흔히 경주 최부자 하면 교동 최부자를 말하는데
이는 정무공 최진립이 아닌,
세째 아들 동량의 후손들이다.
18세기 후반의 <경주읍내도>.
경주부윤과 향교가 인접하게 됨으로써
최부자집은 경주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향교옆에 집을 짓는 것에 유림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향교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최부자집의 처마를 보면 의외로 낮다.
마지막 설득 수단으로 집터를 낮춘 것이다.
집터를 한 자 이상 깍아냄으로써 유림의 반발을
막을 수 있었다.
이즈음 최부자집은 경주 사마소를 통해
진사와 생원을 대거 배출해 지역사회의 중심이 된다.
'벼슬은 진사와 생원 이상 하지 마라!'
경주 최부자집의 또 하나의 가훈이었다.
당시 경주는 남인과 노론의 당쟁이 치열했다.
그러나 최부자집은 무반가였기 때문에
당쟁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경주 전체의 사림가, 관가와의 유대 뿐만 아니라,
촌락민들을 함께 아우르는 역할을 서원을 통해
꾸준히 해왔고,
또 많은 선행들을 통해 범민들로부터 존경과
선망의 대상으로 자리잡아 그들의 가문의 위치를
점차 상승시키게 합니다."
- 정순우 대학원장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은 덕망있는 부자.
왜 최부자만이 이런 명망을 가져올까?
어디에도 최부자집의 선행의 동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왜 이들은 이런 훌륭한 부자가 되었을까?
1650년경의 최부자집 재산내역 문서.
그 의문을 풀기 이해 최부자집의 고문서를
분석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노비보다는 토지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서
매입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과 범위는 굉장히 방대합니다.
'매득(買得)'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후 신분제의 혼란속에
양반과 농민들로부터 땅을 헐값에 매입해
재산을 늘리는 게 당시 전반적인 풍조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사회문제에 부딪힌다.
'도적 백 여명'
'도적패에 의한 피해상황 수사보고서'
최씨 문중의 문서에는 백여 명의 도적떼가
침입한 기록이 있다.
최진립의 손자 최국선때 '명화적'이란
도적떼를 만나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도적들의 소행이 특이했다.
문서들을 불태우고 찢어버린다.
'열파(裂破)'
충격적인 기록들은 이어진다.
불시에 들이닥친 도적들은 칼로 얼굴을 긋고
허벅지를 찌르나 죽이지는 않았다.
살해 목적이 아니라 괴롭히고 위협하는 정도였다.
'칼로 온 몸에 상처'
불을 밝히고 공공연히 약탈을 한다는 뜻의
'명화적(明火賊)' 전쟁후 몰락하여 먹고 살 길이 없는
최하위계층이었다.
이들의 행위는 일종의 절망이었고,
격렬한 사회적 저항이었다.
참혹한 일을 겪은 3대 최부자 최국선은
합법적인 부의 축적이라고 해서
모두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국선에게 대전환의 계기였다.
"슬기롭고 효과적으로 받아들였다고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서 '명화적'이
자기 이웃이고,
자기의 노비들이다,
이렇게 생각해서 원한을 가지고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원하는 방향,
가난에서 구제한다든지,
농업경영에 있어서 소작인들과 이익을
더 효과적으로 나누는 방식 등,
이런 방향으로 원한관계를 긍정적 방향으로 바꾼,
타 가문들과 비교가 되는,
역사적으로 교훈이 되는,
대단히 귀중하고 훌륭한 재산운영방식을
취하게 됩니다."
- 안승준
경주 최부자집의 진정한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뜻하지 않은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고,
그것을 새로운 방향으로 바꿀 줄 아는 지혜.
이때부터 최부자집은 하층민들과 철저히
나누는 상생의 길을 걷게 된다.
5.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
역사의 뼈저린 경험에서 교훈을 얻게 된 최부자집.
다른 양반들이 권위와 힘으로 이웃들을 장악했다면
최부자집은 이웃들과 신뢰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유지하게 된다.
이미 400년전에 최부자집은 상생의 길을 통해 부를
유지하는 지혜를 가진다.
그런 경주 최부자집에 최대 위기가 닥친다.
그러나 바로 이때 수백 년을 이어온 최부자집의
저력이 드러난다.
1910년. 나라가 망했다.
11대 최부자 최현식과 아들 최준은
집밖 출입을 끊고 매일 아침 북쪽을 향해 곡을 했다.
최현식(1854~1928)은 집안 살림을
아들 최준에게 넘겨주고 은거한다.
당시 최준(1884~1970)의 나이는 20대 중반,
망국한을 참기에는 혈기왕성한 나이였다.
그는 집안살림에 몰두하는 듯 했다.
그러나 최준의 전혀 다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
일본고등경찰 비밀문건인 <요사>.
구한말부터 1920년대까지 시국사건을 정리한
귀중한 자료다.
1915년에 조직된 비밀독립투쟁조직인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
여기에 뜻밖에도 최준의 이름이 있다.
이 단체 조직원으로서 자금을 제공한 것이다.
'경주군 대표 최준'
'최준 자금 제공(崔浚亦其出資)'
최준은 당시 영남지역 독립군들과 더불어
'조선국권회복단 및 대한광복회'
주요 조직원으로 활동했다.
1917년 공주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10월 출소되었다.
<독립기념관>에는 최준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문서가 있다.
1921년 태평양회의 독립청원서.
워싱턴에 보내는 조선 인민의 탄원서로
조선 독립을 호소하는
내용과 함께 각계 각층 사람들의 서명을 담았다.
최준은 역시 경주대표로 참여했다.
그리고 조선 독립 투쟁사에 큰 획을 긋는
만남이 이루어진다.
백산 안희제(1885~1943, 독립투사)와의 만남.
백범 김구와 함께 양맥인 백산 안희제는
다각적인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안희제가 1918년 최준을 찾아온다.
그는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부산 <백산상회(白山商會)>의 중요성을
최준에게 설명하며,
이 회사를 통해 독립운동자금을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는데 동참하자고 제의한다.
최준은 안희제의 뜻을 받아들이고 백산상회의
사장을 만난다.
백산상회는 조선 최고의 무역회사로 성장한다.
최준의 장손인 최염(75세)은 최준의 소중한
문서를 내놓았다.
최준앞으로 온 '대차대조표'였다.
무역업체로 위장한 <백산상회>는 독립운동의
자금줄이었다.
막대한 독립자금을 제공하느라 <백산상회>는
늘 적자에 허덕였다.
"백산상회 운영을 통해서 상해 임시정부로
자금을 보내게 되는데 그 방법은 늘 결산 적자로
처리해 감시를 피할 수 있었고
지속적으로 상해 임정에 자금을 보내게 됩니다."
- 이동인 책임연구원(독립운동사연구소)
<br>
▲ 백산상회의 대차 대조표
일본 경찰들도 백산상회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었다.
그 감시망을 뚫고 임정에 자금을 전달해야 했다.
"증인 등은 국권회복을 위해 백산상회를 설립하고
상해 임정에 거액의 자금을 보내지 않았는가?"
좁혀오는 일본의 감시망속에서도
최준은 독립운동의 끈을 놓지 않았다.
"김구선생의 지령을 받고 왔다, 김좌진장군의
심부름을 왔다,
비일비재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확실한 지 아닌 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아니라면 일경에 구속될 수 있는 것이니
위험했습니다..."
- 최 염
최준의 두 동생도 독립운동에 나섰다.
특히 둘째 동생인 최완은 <대동청년당>을
거쳐 1920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재무위원과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한다.
그러나 최준은 뼈아픈 고통을 겪어야 했다.
최준에게 글씨를 배우고 싶다며 드나들던
일본경찰.
그러나 진짜 속셈은 따로 있었다.
최준의 글씨체를 모방해 최완을 체포하기 위한
수작이었다.
부친이 위급하다는 위조된 편지에 속아
귀국하다가 체포된 최완은 고문끝에
35세의 짧은 생애로 순국한다.
동생의 죽음과 일경의 끊임없는 회유와 탄압.
그리고 기약없는 조국광복.
이 모든 살얼음판을 참으며 최준은 인고의
삶을 견뎠다.
1945년 마침내 광복.
그리고 백범 김구를 통해 최준의 진면목이
알려진다.
"어떤 사람이 와서 "김구선생님께서
할아버지(최준)를 만났으면 하십니다" 하자,
할아버지께서 "아, 만나야지요.
그러나 그 어른은 요즘 너무 만날 분이 많아서
면회가 잘 안 된다던데" 하니까,
"아니, 김구선생님이
최준선생님을 꼭 만나고 싶어 하셔서
제가 모시러 왔습니다.
저랑 같이 가십시다." 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께서 올라가시는 걸 봤습니다."
- 최 염
1946년 김구의 경교장.
"동지가 보내준 자금은 조국독립을 위해서
소중하게 썼습니다."
김구는 최준에게 임정의 자금 조달 인명
기록장을 보여준다.
최준은 안희제를 통해 보내준 자금이 한 푼의
오차도 없이 임정에 송금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3년전 일경의 고문으로 세상을 떠난 백산에
대한 존경으로 백산의 고향 의령을 향해
최준은 절을 했다.
"백산, 나를 용서하게. 백산..."
부자가 나라 위해 돈을 내놓은 것이 무슨
자랑이냐며 공적이 알려지길 꺼렸던 최준.
그가 국민훈장애족장을 받은 것은
지난 1990년이었다.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쌓은 부는
당연히 조국광복을 위해 바쳐야 한다고
생각한 이들이 최준의 후손들이다.
해방 이후 최준은 또 한 번 큰 결심을 한다.
400년간 이어온 부를 영원히 보존하는
방법을 찾게 된다.
6. 영원한 부자로 남는 법-기쁘게 버려라!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최부자집의 선산이 있는 곳이다.
최부자집의 역대 조상이 모셔진 이 땅을
기증받은 대학이 개인에게 땅을 팔면서
최부자집의 묘역이 철거될 위기에 처해 있다.
"여기 우리 선대 세 분의 묘소가 계신데
지금 이 묘들을 철거해야 한다고 하니까
우리 후손으로서는 뭐라고 송구한 마음을
전할 길이 없습니다."
- 최 염
12대 400년을 이어온 최부자집이 선산을
떠나야 하는 현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수많은 동지들과 동생들이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을 지켜본 최준.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위해
반드시 해방된 나라를 튼튼히 만들기로
결심한다.
최준은 그의 재산이 의미있게 쓰일 방법을
고심한다.
그리고 전재산을 육영사업에 쓰기로 결심한다.
교육사업에 쓰는 게 만석꾼의 재산을
영원히 보존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최준은 선산과 만석지기 토지와 살고 있던 집까지
모조리 학교사업에 희사한다.
지금의 영남대 의대가 있는 곳.
원래 이곳은 대구대가 있는 장소다.
대학 설립을 결심한 최준은
경북의 유력 인사들을 설득하고 도민들의
뜻을 모아 사립대학을 세우기 위해 노력한다.
그 결과 1947년. 마침내 대구대학이 설립되었다.
최준은 재단이사장이 되어 육영사업에 몰두한다.
그러나 1961년 5. 16 군사정변이후
'대학설치령'이 강화되면서
대구대학은 심각한 운영난에 봉착한다.
최준은 고심했다.
그리고 당시 최고 부자였던 이병철에게
아무런 댓가를 받지않고 넘겨준다.
"(할아버지께서) 너가 처신을 잘 못하면 오
해를 받는다.
어렵더라도 너 스스로 개척해서 살아라.
절대 명심해라."
- 최 염
그러나 이병철은 곧 대학 운영에서
손을 떼게 되고 1967년 대구대와 청구대가
합병하더니 영남대가 개교한다.
그리고 대학 운영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박정희 일가로 넘어간다.
독립투사 최준이 세운 학교가
최고 권력자 박정희에게 넘어간 현실.
제 1장 총칙 - '교주 박정희 선생'
최준은 나라가 더 발전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일언하고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1990년 10월 마지막 최부자 최준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해방이 되었으니 일경의 감시도 없고
전재산을 희사했으니 도둑이 들 일도 없으니
대문을 활짝 열어두라는 말을 남긴 최준.
최준의 죽음과 함께 12대 400년 경주 최부자집은
역사가 되었다.
희사.
댓가를 바라지 않고 기쁘게 버렸다는 뜻인데
전재산은 물론 살림집까지 희사한 선대와
만석꾼 대신 연금 25만원의 독립유공자자손인 게
더 자랑스럽다는 후손.
이것이 바로 경주 최부자의 본 모습 아닐까!
이제 경주 최부자는 전설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현실은 제2, 제3의 최부자를
필요로 하는 때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것은 만석꾼 최부자집이 아니라
상생의 길로 현명한 삶을 이어온
진정한 부자이야기였다.
<br>
▲ 영남대학교의 전신 대구대학교 사진
<br>
▲ 마지막 최 부자 최준(오른쪽)과 그의 동생 최 윤.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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