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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담(池淡)정홍자
봄 안개 정홍자 촉촉한 새벽 봄을 가르며 연천으로 달렸다 이름 모를 마을 앞에서 신선의 세계로 빠진 듯 무수한 물방울들이 너울대는 안개 강에 휩싸였다 욕심 내려놓고 침묵의 고요도 즐기라며 온 세상 하얗게 덮어버렸다. 승천하는 안개 속살을 들여다 볼 제 땅 속에서 무연 피어오르는 듯 봄 안개 황홀경에 빠져들어 본다. 아, 또 다른 봄이 내게 찾아왔음에 기쁨의 환호성이 터진다.
창신동 길 정홍자 아날로그 사진기 받아 들고 훈장 단 용사처럼 콧노래 부르며 창신동 골목을 누볐다 길바닥 바느질 땀 하얀 실선은 17세 소녀시절 시다반장 추억과 전태일이 겪었던 봉제공장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널브러진 실타래처럼 흩어진 골목길 따라 허름한 대문에 맞닿으니 이 집이고, 저 집이고 미싱 소리 파바바바 장단 맞춰 쉼 없이 돌아간다. 가파른 언덕길엔 허리 펴는 노파의 무거운 다리 위로 가쁜 숨소리가 목에 차오를 때 낯선 청년의 내민 손이 아름답다.
매 화 정홍자 섣달 보름 휘영청 달빛 드높은 밤 무심한 마음 창문 넘어 흘려 보니 매서운 한파 속 매화가지 애달픈 사랑 서러워 눈물인 듯, 눈 물인 듯 은은한 향기 담다 꽃봉우리 맺으니 흰 눈마저 취했는지 살포시 덮고 있네. 달빛 드리운 창가에 홀로 앉아 찻물 끊는 소리 마음 달래며 매화꽃봉우리에 시름 얹고 시린 가슴 달래 본다. 언약한 매화가지 섣달 찬바람에도 고고한 자태 뽐낼진데 짧은 사랑 스치는 걸 어찌 아파 서러 울꼬 이깟 세월 잠깐이면 지나갈 걸 향기 품지 못하고서 아픈 가슴 움키는 고 매화꽃 만개할 봄날 머지않았으니 향기 좋은 매화꽃차 대신 커피 향에 시름 내려놓네.
보리밭 밟기 정홍자 눈발처럼 시린 찬바람이 뼈 속까지 파고드는 겨울 끝자락 홋바지 겹겹이 껴입어도 발가벗은 몸처럼 한기가 휘감도는 지독히 추운 날 아들 손자 며느리 보리밭 밟아 다지러 간다. 눈비 없는 날 골라 보리밭에 나가지만 산등성이 보리밭은 엄동설한 혹한 찬바람 잔치 얼었다 녹았다 부풀어진 땅위를 보리 뿌리 찬바람 들세라 들뜬 뿌리 자근자근 밟지만 어린 아이 발도장이 무슨 소용 있으랴만 온 식구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음질한다. 언 손 호호 불고 볼 딱지 에이는 듯 감각 없는데 몇 살 더 먹어 봤자 올망졸망 어린아인 걸 형이라는 이유로 무거운 돌덩이 로라 어깨에 걸고 황소처럼 용을 쓸 때 철부지 동생들은 이리저리 뛰놀며 한 몫 거든다. 할머니의 구수한 얘기에 정신 팔아 보지만 추수할 때 한나절이면 끝나..
자장면 정홍자 봄기운이 좋아 바람 난 처녀처럼 들뜬 마음으로 안양천을 걸었다. 만물이 기지개를 켜 듯 안양천에는 생기가 돌았다. 물오른 개나리가지, 유유자적 노니는 물오리 한 쌍, 엄마 손잡고 잉어를 구경나온 아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운동하는 사람들. 특별히 내게는 지루하고 추웠던 코로나 겨울이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싶다. 그동안 코로나 때문에 사업을 펼쳐도 못 본 바비레따 철거에 마침표를 찍어서일까? 한결 가벼워진 마음 때문인지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모처럼 느끼는 자유와 여유다. 점심때가 되어 ‘무엇을 먹을까?’ 생각하며 수촌마을 쪽으로 걸었다. 가볍지만 맛있는 점심을 먹고 싶다. 설렁탕집을 지나고, 고깃집을 지나고, 백반집을 지나도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런데 한 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분홍색 프..
염색 샴푸 광고 모델 정홍자 염색샴푸 모델을 구한다는 메시지가 왔다. 8월 23일부터 26일까지 4일간 샴푸하면서 머리 색깔이 변하는 과정을 촬영하며, 게런티는 100만원이라고 했다. 자세히 묻지도 않고 지원을 했더니 머리색이 변하는데 괜찮겠느냐는 질문이 왔다. 여러 번 지원하라는 메시지에 한 번도 응하지 않았기에 다시 물었던 것이다. 괜찮다고 했더니 캐스팅이 되었다. 예전에도 모 회사 염색샴푸 제품 모델을 해 본적이 있다. 그 때도 4일 동안 샴푸하고 변색하는 과정을 촬영한다고 했지만, 검정 스프레이를 사용하여 4주를 샴푸한 것처럼 색상을 내고, 하루에 촬영을 마쳤다. 그런 경험이 있어 자세히 묻지도 않고 지원을 했다. 첫날 9시 촬영 현장에 도착했다. 지하 2층 넓은 스튜디오에는 시니어 헤어모델 남녀..
굿 당 정 홍 자 사업이 어려운 친구가 점집을 가고 싶어 했다. 몇 년 동안 사업이 얼키고 설켜 힘든 상황을 잘 알고 있는 터라 동행을 했다. 신내림을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용하다는 점집이라 예약을 하고 한 달을 기다렸다. 간호사였던 그녀는 할머니의 되물림을 받아 아기 신(神)이 내려 점쟁이가 되었다고 한다. 얼굴도 예쁘고 풋풋한 아가씨였다. 선량하게 생긴 입에서 하는 말마다 ‘귀신이 곡하게 생겼다’는 말이 연신 나오게 맞추었다. 그녀는 사업이 어려운 이유가 3년 이내에 시댁 쪽 죽은 조상 때문이라며, 축원을 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굿을 해야 풀린다고 했다. 친구는 남편이나 집안과는 상의할 수 없다며, 나에게 의논을 했다. 우리는 상담료라고 생각하고 굿을 하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예전에 만신..
그 해 여름 장마 정 홍 자 그 해 여름 장맛비는 덕천마을을 덮쳤다. 철공소에서 일하며 근근이 지하 월세 방을 전전하던 소년의 괴나리봇짐은 대문 밖 길거리로 내동댕이 쳐 졌다. 부모님 일찍 여의고 동생 데리고 사는 삶이 고달팠지만 그 해 여름만큼 막막한 적은 없었다. 거대한 폭풍우가 홀딱 뒤집어 쓸어버린 무시무시한 그 해 여름 장마 소년은 눈물을 삼킬 여력도 없이 앞만 보며 태양보다 더 뜨겁게 살았다. 먹먹한 가슴의 흙탕물을 정화하듯 배우고 또 배우며 성인이 되었다. 장대비 속에 오갈 데 없던 그 해 여름을 간직한 채 빗방울 수만큼의 시간이 흐른 지금 품어 준 안양이 고맙다며 가슴에 빛나는 배지를 달았다. 하늘이 찢어진 듯 물 폭탄 장맛비가 쏟아지던 날 또다른 소년의 괴나리봇짐이 대문 밖으로 내동댕이 쳐..
야 초 (野 草) 정 홍 자 세상에 저절로 나는 생명이 어디 있으랴 거슬러 올라가면 나의 조상의 조상이 하늘과 바람과 햇빛의 정기를 받고 온 혼을 다해 오늘에 이르렀거늘 세상에 귀하지 않은 생명이 어디 있으랴 금수저 흙수저 환경이 다르다고 존귀함까지 다르겠는가? 태어난 환경이 척박하나 한 하늘 아래 살고 있거늘 화초보다 못한 생명이라 어찌 말하겠는가? 세상에 이름 없는 생명이 어디 있으랴 들판 산등성이에 널브러져 아무렇게나 산다하여 야초라 부르지만 오늘 그대가 나를 위해 이름 붙여 준다면 훗날 누군가는 나의 이름을 불러 줄 것을. 세상에 야초 없이 화초가 빛날 수 있으랴 보이지 않는 후미진 곳에 거친 생명력으로 살아가지만 그대 내가 있어 빛난다는 것 쯤 알면 좋으련만
영산홍 사연 정홍자 영산홍 빛 젊은 날의 엄마의 화무십일홍 17살 아부지 만나 6남매 낳았다며 수줍은 새색시인양 두 볼 붉어지며 추억 내비칠 때 백수(白水)의 마음 담은 백수(白壽)의 우리 엄마 “느그 아부지는 뭐하시는지 왜 날 데리러 안 온 디아” 백수(白壽)가 왠 말이냐 노래처럼 되읊으신다. 모정(母情)도 덮쳐 버린 코로나 영산홍 꽃 피고 지고 다시 핀 5월에 흰철쭉 꽃빛 머리에 인 두 남매 바라보며 앙상한 손 내밀며 눈가 붉어지신다. 물여울 잔잔한 반월 저수지 물새 한 마리 홀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외로운 사연들 떠난 님 만나는 날 조근조근 들려주려 새빨간 영산홍 붉게 타오르는 꽃빛에 한 잎 두 잎 겹겹이 설레임 새기신다. - 요양원에 엄마를 만나고 오는 5월에-
허리 굽은 소나무 정홍자 대지를 가득 채운 초록빛 춤추는 6월, 초등학교친구와 동심 따라 추억 따라 고향인 고창 심원 서해안을 여행했다. 서해안 여행은 심원에 사는 정숙이 부부가 안내를 했다. 경숙이 남편이 가이드를 자청했다. 그들 부부는 만돌 숲길로 안내했다. 만돌 숲길은 구시포 해수욕장과 동호해수욕장 인근에 있는 만돌 해수욕장을 끼고 해변을 따라 한 시간 가량 산책할 수 있는 숲길이다. 데크로 단정하게 정리된 숲길은 끝없이 펼쳐진 갯벌과 바다내음 담아 부는 바람, 드높은 파란 하늘이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이다. 돌게가 부지런히 오가는 갯벌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땅이다. 바다 끝 저 멀리에는 조개 잡는 어부들의 모습이 조그맣게 보이는 고즈넉한 6월의 서해는 타임머신을 돌려 어릴 적 동심으로 빠져들기에..
초원 기차 여행 정홍자 강기슭 그린아나콘다처럼 길고 육중한 기차가 꿈틀꿈틀 굼뜨게 초원을 가로지르며 철로에 미끄러지듯 끼이익 소리 한번 치더니 다르항 기차역에 멈춘다. 시베리아의 푸른 눈이라 불리는 수정처럼 맑은 바이칼호수의 신성한 기운 온 몸에 휘감았다 ‘좋아라’하던 들뜬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시베리아 열차 469Km 다시 버스로 356km 꼬박 하루하고 반나절 국경을 넘어온 우리는 푹 절여진 배춧잎처럼 휑한 눈과 축 져진 몸으로 울란바토르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또다시 230km 대장정의 달콤한 여행의 고행길 무심한 마음으로 오른 초원 기차는 시들해진 마음에 초록빛 물들 때 흥얼거림의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꼬불꼬불 긴 기차 앞머리가 흐느적흐느적 초원을 가르며 지날 때면 먼 구릉지와 맞닿은 파아란 하늘..
정 홍 자 찔레꽃머리 어느 날 또다시 못 만날까 조바심 내며 단숨에 달려 간 그 곳에는 앙상한 가지만 남은 찔레꽃나무 한 그루 있다. 보릿고개 허기진 배 채우라며 연초록 팔 벌려 내어 준 보드랍고 달착지근한 새순처럼 노릿노릿 구수한 누룽지 내밀던 연분홍 찔레꽃 가시밭 같은 시집살이 서러운 밤이면 찔레꽃 노래를 구성지게 부르며 초록 눈물 감추던 달빛 서러운 하얀 찔레꽃 투박한 거친 땅에서 가시로 받쳐 든 잎새 피우며 모진 세월마다 않고 꽃향기 축제에 신바람 난 빨강 찔레꽃 얽히고설킨 지난날의 생채기조차 사랑의 열매 고결한 빛 담아 송두리 째 주고 싶어 안달 난 나의 찔레꽃 순결한 꽃빛 속 노란 꽃수술처럼 새겨진 그 이름 허공을 향해 외치는 외마디 절규 당신은 나의 찔레꽃
정 홍 자 아들아!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 손 좀 잡아줘. 너를 위한 기도로 가슴 움켜쥐고 한 세월 보냈더니 이른 나이에 내가 누구인지 잊어져 가려하네. 남몰래 가슴에 묻어 둔 사연들이 하얗게 백지가 되어 가나보다. 어느 날부터 종잡을 수 없는 말들을 되풀이하고 수시로 속옷 적셔 부끄럽지만 그건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다는 걸 너희는 알겠지? 아들아! 너그러운 마음으로 내 손 좀 잡아줘. 너를 향한 내 마음 사랑이 병이 되어 가슴 서리더니 지독한 나의 기억들은 저 멀리 사라져 가려하네. 남몰래 가슴에 묻어 둔 사연들이 하얗게 빛바래 가나보다. 어느 날 부터인가 쇠약해 진 다리를 비틀거리며 흐트러진 머리조차 손질할 순 없어도 한 때는 너를 들어 안았다는 걸 너희는 알겠지? 아들아! 한때는 네가 가장 사랑하..
고모님! 설 명절을 앞두고 고사리나물을 하다말고 고모 생각에 눈시울을 적십니다. “우리 홍자는 나물을 좋아해서 여러 가지 했다. 특히 너 좋아하는 감주를 많이 만들었어. 언제 올래?” 명절 앞이면 어김없이 전화하셔서 언제 올 거냐고 채근하시던 모습이 떠올라 나물을 볶다 말고 요양원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고모, 홍자야”. “응”. “홍자가 누구야?”. “내 조카 딸”. “얼굴 기억 나?”. “응, 언제 와?”. “언제 와” 만 반복하시는 나의 고모님! 내 소중한 고모님이 치매로 요양원에 가신지 벌써 2년 2개월이 되었네요. 올해 춘추 78세이신데. 가물가물 꺼져가는 흐릿한 촛불처럼 겨우 목에서 끄집어내는 듯 한 힘없고 가느다란 목소리! 요양원에서 하염없이 저를 기다리고 계실 고모님을 생각하며 그리움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