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에 도전
'버락 후세인 오바마'
이것이 미대통령 당선자의 정식이름이다. 무슬림과 아시아의 이미지가 풍기고 유럽의 엘리트처럼 이야기하고 피부색은 흑인인 사람. 아버지가 케냐 유학생 출신이고 하와이서 태어나 인도네시아 양아버지 밑에서 유아기를 보낸 사람.
미국에서 이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는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정상적 교육을 받은 미국 부모라면 이런 배경을 가진 자녀에게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하게 자라면 대통령도 될 수 있다'라는 얘기를 진심으로 하기는 쉽지 않다. 미국은 기회의 땅이라 불리지만 그것 역시 피부색, 인종, 종교에 따라 범위가 정해져 있었다. 오바마와 그 참모들 역시 이것을 모르지 않았다.
단, 오바마 캠프 내에서는 폴스터인 코넬벨처(그 역시 흑인이다)의 말처럼 미국에서 흑인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아직 어려울 수 있지만 뛰어난 인물인데 그의 피부색이 우연히도 흑인이라면 미국민은 그를 대통령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오바마가 당선되기 위해서는 유리한 여건 조성은 물론이고 다른 여느 후보들과 달리 작은 실수도 없는 완벽에 가까운 캠페인을 벌여야 했다.
참신한 대안후보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오바마의 개인적 조건을 차치하더라도 민주당은 사실상 대세론을 굳혔다고 평가받는 힐러리 클린턴이 있었다.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심지어 민주당 예비경선의 일정이나 방식도 클린턴 전략에 맞게 짜여졌다. 힐러리와 빌은 민주당 주류의 실질적 리더였다. 더군다나 그녀 역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미국 역사에서 여성과 인종은 오랜 구조적 차별 속에 점진적 진보를 보여 왔다. 그러나 항상 여성이 한발 앞서 문을 열었다. 피부색보다는 성별이 좀 더 받아들이기 쉬운 변화였는지도 모르겠다.
힐러리측 전략은 조기에 아이오와와 뉴햄프셔에서 매듭을 짓겠다는 것이었다. 힐러리가 아이오와를 이기면 대세론은 힘을 받고 그 다음은 보나마나한 게임이 된다는 게 공통된 전망이었다. 오바마는 사실 힐러리의 대안도 아니었다. 그 다음은 2004년 민주당 부통령후보였던 존 에드워드가 있었다. 그는 2004년 이후 진보세력에 공을 들였다. 힐러리가 선두주자전략을 준비했다면 에드워드는 포퓰리스트한 십자군적 전략이었다. 빈곤을 얘기했고 저소득 근로계층을 겨냥한 각종 정책을 준비했다.
그러나 일부의 민주당 지도부는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선거환경이 민주당에 절대 유리한 해인 2008년 굳이 논쟁적인 후보를 민주당이 선출해 새로운 변수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조 바이든, 에반 바이, 크리스 다드 같은 무난한 주류의원들이 지금과 같은 선거환경에서는 더 유리하다고 본 것이다. 오바마의 참신함은 인정했으나 대안 후보군 리스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당 지도부나 워싱턴 인사이더들의 생각이었지 일반 민주당원들의 생각은 아니었다. 일반 민주당원들을 중심으로 미국민들은 변화를 갈망하고 있었다. 2004년 하워드 딘에게 보여준 젊은층의 열광은 이러한 근본적 변화가 내부적으로 꿈틀되고 있음을 보여준 예였다. 단순한 여와 야의 정권교체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변화, 미 사회를 흔들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변화. 이런 변화의 메시지를 이끌어 줄 메신저를 찾고 있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후 민주당으론 유일하게 재선에 성공한 빌 클린턴은 이러한 환경에서 오바마가 가진 잠재력을 간파한 인물이었다. 그는 오바마가 대선출마를 고민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너무 이르다.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오바마가 상원에서 좀 더 경험을 쌓는다면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것이다"라는 발언으로 그의 출마에 우회적 반대의 목소리를 전했다. 역으로 오바마가 참신한 대안후보로 힐러리를 위협할 수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완벽한 준비
오바마 캠프는 처음부터 긴 싸움을 예상했다. 만약 아이오와에서 패한다면 선거는 일찍 끝날 수밖에 없음을 인정했다. 반면 자신들이 아이오와에서 이긴다 해도 힐러리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이들은 선거 초반 기세를 잡는다 해도 승부는 대규모 선거인단이 몰려있는 2월의 슈퍼화요일을 넘어 장기전으로 갈 것이라 보고 슈퍼화요일 이후 벌어지는 주들에도 공을 들였다.
선거전략은 오바마의 칼 로브라 할 수 있는 데이비드 액셀로드(사실 이 둘의 관계는 부시-로브의 관계보다 더 밀접하다)가 책임자였다. 그는 시카고 최초의 흑인시장 해롤드 워싱턴, 클리블랜드 시장 마이클 화이트, 현재 매사추세츠 주지사 드발 패트릭 등 백인중산층 지역에서 흑인을 당선 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왔다. 그는 선거책임자 데이비드 플로프, 공보책임자 로버트 깁스 등 소수의 전문가들과 함께 오바마의 절대적 신뢰 속에서 2006년 11월 대선출마를 내부적으로 결정한 시점부터 끝까지 내부적 변화와 잡음 없이 캠페인을 운영했다. 이것은 교과서적 캠페인으로 평가받는 2000년 부시나 92년 클린턴 캠페인에서 보지 못한 완벽에 가까운 캠페인 운영이었다고 평가 받는다.
|
▲ 지난 2월 사우스캐롤라이나 머틀 비치의 팰리스 시어터에서 열린 'CNN/미 하원 흑인의원연맹 민주당 대선주자 토론회'에 나선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 |
ⓒ 연합뉴스 |
오바마-힐러리 | | |
이라크로부터의 출발
오바마의 백악관을 향한 여정은 2004 상원선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그 출발은 이라크였다. 민주당 의회가 부시에게 이라크와 관련하여 사실상의 백지수표를 건네주었을 때 오바마는 공개적으로 이를 비판했다. 이 당시의 입장은 힐러리와 1대1 구도를 만드는 중요한 논리가 되었다. 힐러리가 경험론을 들고 나왔을 때 오바마는 기간의 경험이 아닌 올바른 경험이 중요하며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이라크를 가리켰다.
그러나 2004년 예비경선에서 이라크 문제로 진보진영의 열광을 받았던 하워드 딘과 달리 반전후보로 인식되는 것을 거부했다. 이것은 초기 진보진영을 결집시켜 지지율을 올릴 수 있으나 다수를 만들기 위해 중도로 이동하는 데 발목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04년 민주당전당대회 키노트 연사로 선택된 그는 당파성으로 분열된 미국을 질타하면서 하나의 미국, 통합된 미국을 호소하면서 전국적 스타로 떠오르며 이라크 외에도 정치적 무기가 여러 개임을 선보였다. 그가 내놓은 책들은 연달아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초반 대세를 가를 아이오와와 뉴햄프셔를 방문했을 때 주민들이 보인 반응은 단순한 정치인이 아닌 대중적 인물에 대한 반응이었다.
아이오와 그리고 흑인표
1976년 이전까지 미국선거에서 출발지는 뉴햄프셔였다. 오픈프라이머리라는 특징과 경제적 보수성향과 사회적 진보성향을 보이는 특징이 뉴햄프셔 유권자 성향은 그해 대선의 흐름을 파악하는 좋은 지표였다. 반면 아이오와는 당원만이 참여하는 코커스며 진행과정도 복잡했고 무엇보다 거의 반나절의 시간투자를 요했다. 투표하던 사람만이 투표했다. 당연히 조직이 중요하다.
그런데 1976년 민주당예비경선에서 무명의 전직주지사가 아이오와에서 승리하면서 전국적 인물로 부상했고 궁극적으로 대통령자리에까지 올랐다. 지미 카터였다. 그 이후로 아이오와의 결과는 그 다음 벌어진 곳에서의 모든 여론조사를 바꾸어 놓고 있다. 하워드 딘 역시 아이오와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뉴햄프셔에서 1등을 달리고 있었다.
당시 존 케리가 본인과 지역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가까운 뉴햄프셔 대신 아이오와에 모든 것을 건 이유는 아이오와에서 패하면 뉴햄프셔의 노력은 의미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반면 아이오와에서 이기면 뉴햄프셔는 자동적으로 움직일 거라 기대했다. 이 판단은 적중한 바 있다. 하워드 딘은 젊은 봉사자들을 믿었지만 이들은 지역을 몰랐고 그렇게 오랜 시간 코커스 장에서 시간을 보내기 원치 않았다. 결과적으로 허수였다.
힐러리 진영은 오바마 역시 비슷하리라 예측했다. 2007년 10월 오바마의 자금모금 결과가 힐러리에 뒤지지 않음을 보여주는 상황에서도 두 후보 간의 전국지지율 격차는 30%가 넘었다. 상대라고 의식하기에는 좀 머쓱한 차이였다. 그러나 이러한 자만과 함께 아이오와에 대한 경험부족은 뼈아픈 상황을 가져온다. 빌 클린턴은 아이오와 없이 당선된 특이한 경우이다. 92년 당시 아이오와의 아들 탐 하킨 상원의원이 예비후보 중 한 명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후보들은 캠페인을 하지 않았고 언론도 하킨의 승리를 당연시 여겼기 때문이다. 클린턴에게 아이오와는 미지의 지역이었던 것이다. 결국 아이오와에서는 선거 당일부터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젊은이들이 몇 시간씩 자리를 지키며 코커스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말만 하고 투표는 하지 않는다던 바로 그 신세대들이 대거 선거에 참여한 것이다. 이라크전 철군을 주장하는 골수 민주당원들도 오바마에 한 표를 행사했다. 거기에 힐러리는 에드워드와 표가 분산되면서 에드워드에게도 뒤지는 3등의 수모를 겪었다.
오바마의 아이오와 승리는 1960년 존 케네디의 웨스트버지니아 경선 참여와 비교할 수 있다. 예비경선이 큰 영향을 발휘하지 못하던 60년, 케네디는 웨스트버지니아 경선에 참여한다.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민주당 지도부에 아일랜드계이며 가톨릭신자인 자신이 개신교 중심의 주에서 경쟁력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
▲ 지난 1월 민주당 아이오와주 코커스에서 경선에 승리한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부인 미셀, 딸 맬리아(왼쪽), 사샤(가운데)와 함께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
ⓒ AP=연합뉴스 |
오바마 | | |
오바마가 경쟁력을 입증해야 할 일차 대상은 아이러니하게 흑인사회였다. 민주당 남부지역 예비경선의 상당부분은 흑인들이 차지하고 있다. 당시까지 이들의 절대지지는 힐러리였다. 그녀의 남편 빌은 '첫 번째 흑인대통령'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흑인들의 지지를 받아왔다. 그 역시 퇴임 후 사무실을 뉴욕 할렘에 마련하며 그들과의 정서적 공감대를 확인했다. 흑인정치권의 리더인 존 루이스, 찰스 랭글 등은 힐러리의 후견인이며 조언자들이었다.
무엇보다 일반 흑인유권자들에게 흑인대통령은 실현 가능하지 않은 얘기였다. 흑인들 사이에 흑인대통령의 문제는 '우리가 할 수 있는가' 가 아닌 '그들이 시켜줄까'였다. 흑인이 소수인 백인유권자 중심의 당 주류의 조직가동이 필수적이라 여겨졌던 아이오와에서 새로운 유권자 층의 지지를 통해 승리한 오바마는 이러한 인식을 일거에 뒤집었다. 이제 모든 여론조사는 오바마와 힐러리를 박빙으로 만들고 있었다. 여기에는 흑인유권자의 표심이 절대적 영향을 발휘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변화, 변화, 변화
이번 선거의 핵심화두는 변화였다. 오바마는 모든 선거캠페인을 이 변화에 맞췄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 프레임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바마의 라이프 스토리와 오바마가 전하는 미국과 국제사회의 모습은 왜 변화가 필요하고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를 설명하는 데 충분했다. 반면 힐러리는 검증된 경험과 능력으로 맞섰다. 그러나 곧 어떠한 메시지도 변화를 압도할 수 없음을 인식했다. 때는 이미 늦었다. 마지막으로 엘리트 대 서민의 대변자의 구도로 프레임 전환을 시도하며 백인 근로층의 지지를 얻으며 선전했으나 변화의 프레임을 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미 오바마의 변화를 희망과 긍정의 변화임을 받아들인 민주당원들의 표심을 돌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본선에서 대결한 공화당 매케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클린턴의 패배를 지켜 본 매케인은 경험으로 변화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곤 자신도 변화이며 더 믿을 수 있는 변화라는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메시지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내용이 일치하지 않고 일관성이 결여되면 유권자에 수용될 수 없다. 매케인이 변화이기 위해서는 왜 지난 4년간 90% 이상 부시법안에 찬성했으며 앞으로의 4년이 부시 8년간 어떻게 다를 것인지를 아주 분명하게 말과 실천으로 설명하고 설득해야 했으나 제대로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이는 지나치게 우경화된 공화당에서 매케인의 불안정한 포지션도 한 몫을 하고 말았다.
다시 경제로
예비경선에서 경제가 핵심이슈였다면 오바마도 매케인도 후보가 되지 못했을 수 있다. 오바마 역시 전당대회 기간까지 경제를 핵심이슈로 가져가지 못한 상태였다. 금융위기는 오히려 이러한 오바마에게 경제문제를 중심의 메시지에 날카로운 각을 세우고 일부 유권자들에게 마지막 남아있던 변화의 필요성을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보여준 두 후보의 발언과 행보는 오바마가 변화를 떠나서도 매케인보다 더 대통령다운 안정감과 신뢰를 보여줬다.
우선 매케인을 보자.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던 날 매케인은 플로리다주 잭슨빌시 유세에서 "미국의 기본경제는 튼튼하다"라는 발언을 했다(오바마는 선거 마지막날 이 잭슨빌을 찾아 맥케인의 발언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는 친절함(?)을 보였다), 그리곤 곧 바로 이 발언을 취소해야 했다. 덧붙여 매케인은 오바마에게 모든 선거운동을 중단하고 곧 있을 텔레비전 토론도 연기하고 워싱턴에서 구제금융 통과를 비롯한 대책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당연히 오바마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언론의 반응도 시큰둥했다. 매케인은 이 주장을 슬그머니 철회했다.
리더십 공백 상태에서 열린 백악관회의에서도 주도권은 오바마가 잡았다. 오바마는 침착했고 분명했다. 매케인은 당시의 경제 위기의 심각성이나 금융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줬다. 더군다나 구제금융이 큰 정부의 보수이념과 배치된다는 주장에 구제금융 입장에 대해 몇 번의 입장을 번복한다. 그리곤 그 주의 일요일까지 바로 다음날인 월요일에 있을 하원의 구제금융법안 표결에서 통과를 당연시하면서 이는 초당파적 역할을 해 온 매케인의 리더십임을 선전했다. 그러나 공화당 우파의원들의 반란으로 구제금융법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이 시각 오바마는 금융위기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자신의 자문단을 모았다. 클린턴 경제부흥의 주역인 로버트 루빈, 래리 서머스, 진 스펄링, 레이건 정부서 경제위기를 구했다고 평가받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위원장을 지낸 폴 볼커(임명은 카터 시절에 됐다),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리는 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 이처럼 경제계의 슈퍼스타들이 오바마를 자문한다는 언론의 보도는 오바마의 경제능력에 신뢰를 더했다.
매케인은 부시 차별화와 함께 본인이 오바마보다 경제대응 능력이 더 뛰어남을 입증해야 했지만 이마저 실패한 것이다. 미국민의 60%가 경제를 가장 중요한 이슈로 꼽았다. 이 시점부터 오바마는 안정적 우위를 점했고 10월 들어서는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50%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했고 이는 선거 당일 날까지 유지됐다.
'새벽 3시' 광고와 사라진 외교안보
워싱턴 경험이 일천한 오바마는 외교안보 문제가 약점으로 지적되어 왔다. 본인도 이런 점을 의식해 상원에서 외교위원회 자리를 잡았지만 생각보다 도전의 시간이 훨씬 더 빨리 닥친 셈이었다. 힐러리캠프는 이번 선거의 대표적 광고로 평가받는 '새벽 3시' 광고를 내놓아 부동층의 표심을 흔든 바 있다.
84년 신민주당 깃발을 들고 나온 젊은 비주류후보 게리 하트에 맞서 부통령 출신 주류 후보 월터 먼데일캠프가 내놓았던 광고로 복잡하고 위험한 국제상황에서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면 그것은 모든가 잠자고 있는 평온한 새벽3시에 백악관에 전화가 울릴 수 있다는 식의 광고로 그때 어떤 후보가 그 전화를 받아야 안심하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오바마 캠프는 위축되지 않았다. 하루 만에 또 다른 새벽 3시 광고를 내놓으면서 그 전화를 받는 사람은 잘못된 전쟁을 지지하여 미국을 불필요한 위험에 빠트리지 않을 정확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고 응수했다. 외교안보 이슈는 오바마의 부통령 선택에도 영향을 미친다. 매케인은 스스로도 경제는 잘 모르지만 외교안보는 전문가가 필요없다고 할 정도로 자신감을 드러냈던 분야다. 그리고 이것은 단 한번 매케인에게 기회를 제공한다.
러시아가 그루지아를 침공했을 당시다. 전당대회를 앞두고 공화당기반을 결집하던 그는 이 여세로 여론에서도 우위를 점한다. 그러나 그루지아대통령 이름을 몇 번이나 잘못 말하고 러시아를 G-8에서 퇴출시켜야 한다는 등 비현실적인 강성 발언을 하면서 오히려 호재를 나이의 문제로 연결시키며 스스로 이슈를 잠재우는 우를 범한다.
반면 오바마는 부통령 후보로 상원외교위원장인 조 바이든 상원의원을 지명한다. 선거지형으로서는 인디애나 에반 바이 상원의원이나 버지니아 팀 케인 주지사가 필요했지만 외교안보에서 최소한의 안심을 시키지 못한다면 오바마의 변화가 중도층에게 지나치게 위험하게 다가갈 수 있다는 현실적 판단이었다. 그리고 9월 15일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을 기점으로 경제가 미 사회를 뒤덮었다. 외교안보문제는 더 이상 부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선거 막바지에 나온 콜린 파월의 지지 선언은 그가 흑인이기 때문에 그랬다는 일부 보수층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중도부동층에게 외교안보에 있어 안심을 주는 효과를 발휘했다.
|
▲ 미 대선후보 TV토론 버락 오바마와 존 매케인이 지난달 7일 내슈빌 벨몬트대학에서 열린 대선토론에서 악수하고 있다. |
ⓒ AP=연합뉴스 |
미대선 | | |
텔레비전 토론
선거환경과는 별도로 유권자는 대통령후보에서 세 가지 면에서 최소한의 기준을 요구한다. 1. 강한가 2. 신뢰할 수 있는가 3. 호감이 가는가. 도전자의 경우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기 때문에 텔레비전 토론을 통해 현역 또는 이미 잘 알려진 상대와 함께 비교되면서 과연 이 세 가지를 충족하는 대통령감인가를 평가 받는다. 기회이자 위기인 셈이다. 80년 레이건은 카터의 낮은 지지율과 어려운 경제상황에도 불구하고 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었다. 유권자가 이미 카터 행정부를 거부했지만 레이건이 안정적 대안인지에 대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건의 극우파적 발언과 행보들이 중도층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선거 며칠을 남기고 벌어진 한차례의 텔레비전 토론으로 해소했다. 미국민은 레이건이 카터보다 더 대통령답고 동시에 호감가는 인물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2008년도 역시 이와 유사했다. 금융위기 한복판에 벌어진 토론에서 오바마는 냉정하고 침착했다. 반면 매케인은 공격적이고 조급해 보였다. 마샬 맥루한의 이론에 따르면 텔레비전은 쿨(cool)한 매체이다. 따라서 핫(hot)한 매케인이 쿨한 오바마와 대비되면 오바마가 돋보일 수밖에 없다. 또한 잭시 잭슨과 앨 샵턴 등 민권운동을 통해 성장한 공격적인 흑인정치인들을 생각했던 백인 부동층에게 오바마는 오히려 윌 스미스(영화 <나는 전설이다>의 주인공인 할리우드 배우)였다는 평을 받는다. 세 차례 토론 모두 오바마의 완승으로 끝났다. 이제 더 이상의 변수는 없어 보였다.
네거티브와 브래들리 효과
선거 막판 들어 매케인 캠페인은 사상 유례 없는 네거티브 캠페인을 벌였다. 미국이 오바마에 의구심을 갖지 않는 이상 이번 선거는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공식, 비공식적으로 오바마의 중간 이름인 '후세인'이 공화당모임에서 사용되었고 오바마의 종교가 이슬람이라는 주장이 난무했다. 또 60대 반전운동 당시 테러리스트로 재판받았던 그러나 지금은 권위있는 교육학자가 된 빌 에어스와 과거 교류를 빌미로 테러리스트와의 연관도 암시하는 광고가 연일 틀어졌다. 동시에 오바마와 민주당의회가 사회주의정책을 펼 것이라 겁을 줬다.
여기에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브래들리 효과에도 기대를 걸었다. 1982년 탐 브래들리 L.A. 시장이 캘리포니아 주지사선거에서 마지막 여론조사에서 앞서고 막상 결과에서 패한 이후 흑인 후보자들은 여론조사보다 실제결과가 더 적게 나오며 이는 흑인에 투표할 수 없는 인종적 편견을 가진 이들이 조사에서 솔직하게 답변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이론이다. 결론적으로 브래들리 효과는 없었다. 시대도 상황도 후보도 이슈도 모두 달랐다.
돈이 말한다
공화당은 부자당이다. 당연히 선거에서 압도적 자금의 우위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부시는 두 번의 선거에서 이를 여실히 입증했다. 그러나 오바마는 인터넷을 중심으로 소액 다수의 참여를 통해 천문학적 자금을 마련했다. 4백만명 이상이 오바마의 변화에 십시일반으로 거들였다. 선거관리위원회의 데이터베이스가 수용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오바마의 선거자금은 2004년 부시와 케리의 선거자금을 합친 것보다 많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러한 풍부한 선거자금은 선거 보름을 남긴 상황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이 시점에서 후보캠프는 전략적 판단을 하게 된다. 주별 선거인단에 따른 선거이며 승자독식으로 가는 방식(메인주와 네브래스카주는 예외)에서 전당대회 이후 20개 주 정도에서 캠페인을 벌이며 점차 줄어들다 마지막 일주일 정도를 남기고는 5, 6개 주 정도에서만 접전을 벌이게 된다. 특히 민주당의 경우는 지난 두 번의 선거에서 경합지 몇 곳에서 자금부족의 이유로 철수하는 아픔을 경험한 바 있다. 이번에는 달랐다. 오바마는 거의 모든 주에서 조직과 텔레비전 광고를 풀가동했다. 지칠 줄 모르고 들어오는 선거자금과 전 세계적으로 몰려드는 자원봉사자들 덕분이었다.
반면 매케인은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오바마캠프가 철수해야 안심하고 접전지에 돈과 사람을 투여할 텐데 오바마캠프는 막판에 노스다코다, 몬태나, 애리조나(매케인의 출신주) 등과 같은 민주당이 지난 수십년간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지역에까지 공세를 벌였다. 오히려 매케인은 미시건을 필두로 콜로라도, 아이오와 등에서 철수를 결정한다. 이를 통해 오바마는 최초로 예선과 본선 모두 선거자금법에 따라 지출을 제한하는 조건으로 받는 정부지원금을 받지 않는 후보가 되었다. 이는 앞으로의 대선후보들의 선거자금법에 대한 태도와 자금모금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
▲ 오바마 당선 미국 대통령 당선자 버락 오바마가 지난 4일 시카고에서 2008 미국 대통령 선거전의 승리자로 선언된뒤 그랜트 공원에서 열린 선거의 밤 집회에서 연설을 마치고 부인 미셸 여사, 그리고 부통령 당선자 조 바이든 상원의원과 부인 질 여사와 함께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
ⓒ EPA=연합뉴스 |
오바마 | | |
담대한 변화
오바마는 52%라는 득표율로 32년 루즈벨트 이후 현역이 아닌 민주당후보로는 최초로 50% 이상의 지지율을 받는 기록을 남겼다. 또한 젊은층과 소수민족의 투표참여로 투표율은 65%에 육박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신을 공화당 또는 보수주의자라고 칭하지 않은 유권자성향에서 대부분 승리를 거두었다. 64년 이래 보여준 놀라운 참여율이며 민주당의 압승이다. 이는 동시에 선거가 관심 있고 흥분시키며 유권자의 삶과 직결된다고 여겨지면 언제든 참여는 늘어날 것이라는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민주당은 대선에 이기기 위해 남부 출신 후보가 나와야 한다는 오랜 콤플렉스를 깨트렸다. 47세의 일리노이주 흑인후보는 버지니아, 인디애나, 노스캐롤라이나에서 64년 이후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승리의 기쁨을 누렸다. 또한 양당체제에서 다수당 연합을 만들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히스패닉계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뉴멕시코, 콜로라도, 네바다 등 중서부 지역도 장악했다.
1964년 린드 존슨 대통령은 주변의 반대와 우려 속에 민권법안에 서명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민주당은 한 세대간 남부를 잃어버렸다고 자조했다. 1968년 리처드 닉슨은 이러한 상황을 남부전략으로 정리했고 1980년 레이건 당선을 통해 남부를 공화당화 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같은 해 대선과정에서 암살된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은 암살 직전 6월 <미국의 소리>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사회가 계속해서 진전을 이루면 흑인도 자신의 형(존 케네디)이 올랐던 자리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 공교롭게 올해가 꼭 40년이 되는 해이다. 단기적으로 공화당의 선택이 정치적 이득을 가져왔지만 멀지만 옳은 길을 택한 민주당은 그 결실을 보았다.
미국민은 이번 선거를 통해 단순히 집권당을 심판한 것을 넘어서 새로운 대안에 대해 그들의 희망을 걸었다. 이제 오바마가 미국민에게 그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해야 할 차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