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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담(池淡)정홍자
남자의 자격 본문
남성다움과 여성다움, 남성적인 삶과 여성적인 삶의 기준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있다. 특히 과거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들였던 아버지의 강인함, 남편의 든든함과 같은 남성의 가치들이 최근에는 풍전등화의 상황에 빠진 듯하다. 최근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女風, 알파걸 등의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단어로 묘사되는 것과 달리, 위태로워만 보이는 오늘날 남성들의 모습… 그 문제의 본질은 무엇일까? 아마 지금껏 사회를 지배해온 전통적 남성상 그 자체가 문제였던 것은 아닐까?
그동안 사회를 강하게 지배해 온 남성성의 규범은 “진정한 남성이 됨으로써 나약하지 않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거친 바다 위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해 남자들에게 그러한 강인함은 필수조건이다. 남성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계부양자 모델(breadwinner model)은 이러한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성별을 기준으로 정형화된 남성 모델은 남자 이전에 인간으로서 갖는 개개인의 특성을 무시하며 정서적·관계적 한계를 만들어낸다.
밖에서는 훌륭한 사회인이라는 평을 듣지만 가족 사이에선 외로움을 느끼는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로부터 “사내자식은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침을 받으며 슬픈 일이 있어도 결코 울지 않는 아들. 이들의 역사가 약간의 혼란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씌어지고 있는 요즘이다. 어제는 ‘하늘’과도 같아 보였던 아버지의 모습을 오늘은 다양한 감정과 인간관계에 미숙한 안쓰러운 모습으로 읽어내며, 이제 일부 남성들은 ‘남자의 삶’이라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전통적인 남성 라이프스타일에서 벗어난 남자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여성들만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간호사, 유치원 교사, 전화상담, 화장품 판매직에 뛰어드는 남성들의 숫자가 과거에 비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요리와 패션계에선 이미 오래 전부터 남성들이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남성-사회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대외적 권위와 직함에 대한 기준이 변화한 것으로 설명할 수도 있고,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의 시선이 아닌 개인으로서 나의 욕구”라는 인식 변화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아름다움에 대한 성별화된 가치 부여 역시 변화하고 있다. 여성 못지않게 패션에 민감하고 외모에 관심이 많은 남성들이 늘어나 아예 ‘메트로섹슈얼’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남성 성역할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기존에는 여성만의 자리였던 ‘가정’에 대한 역할 인식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권위적이고 돈만 벌어오는 남편·아버지가 아닌 구체적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 있는 감정을 나누는 가족구성원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 흐름이 대세가 된 것은 아니어서, 노동부와 통계청에 따르면 2009년 신생아 아빠 중 육아휴직을 사용한 사람은 0.11%에 불과하며 일본 국립여성교육회관의 2006년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아버지들이 평일에 자녀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조사대상 6개국(한, 일, 태, 미, 불, 스웨덴) 중 최하위였다. 남성 가사전업자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낮다. 매스컴의 호들갑과 달리 현실은 아직 ‘그렇게 많이’ 변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아직 사회적으로 이토록 강한 영향력을 갖는 전통적 남성 모델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것일까? 여러 설명들이 가능하겠지만 간략하게 그 젠더 지도를 그려보도록 하자.
산업사회에서 여성은 어머니 역할을 담당하며 가정이라는 ‘사적’인 세계를, 그리고 남성은 가정 외부의 ‘공적’이고 직업적인 세계를 담당한다. 성별에 따른 가족의 영역 분리 및 노동분업체계는 아이들이 자라면서 경험하게 되는 동일시 대상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자신의 바로 옆, 즉 구체적 삶의 영역에는 부재하면서도 동시에 추상적이고 권력적 영향을 전달하는 아버지 모델에 성별적으로 동일시하며 남자아이들은 분리적 자아를 형성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학교와 매체 등을 통한 사회화 과정을 겪으며 아이들은 ‘남성다움’에 대한 전통적 가치관을 강하게 받아들인다. 성인이 된 후에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러했듯 여성과 달리 남성은 경쟁관계 속에서 생산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적 영역’에 속하게 되며 남성의 과제는 타인(특히 같은 남성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들의 결과로 현대 남성들은 한 타인의 입장에 서 보는 감정이입능력을 계발하지 않고 억제하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들로 인해 만들어지는 남성 내면의 나약함에 대한 부정과 권력 지향적 특성이 남성 개개인의 인간적 욕구를 억압하며, 동시에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을 담당하는 여성들에게 정서적인 의존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면모는 여성이 대화를 부드럽게 진행되도록 하거나 대인 서비스 업무를 담당하는 등의 감정노동의 성별화 특성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 여성들의 사회진출 바람을 다루는 기사는 오늘날 언론 매체의 단골 메뉴이다. 의료계와 법조계에 진출하는 여성의 숫자가 급속히 늘고 있고 각종 고시에 합격하는 여성의 비중 역시 해마다 상승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사회적으로 공공연한 남녀차별은 사라지고 있지만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남성위주의 관습과 관행이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제적 현상만 보더라도, 여성의 취업 현황은 대우가 열악한 임시·일용직 비중이 높은데다 육아 부담 등으로 경제활동 참여율이 낮다보니 소득 상승의 기회가 단절되고 있다. 여성들의 고위직 진출을 가로막는 회사 내 유리천장(glass ceiling) 역시 아직은 굳건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어느 하나의 성이 해방되면 그만큼 다른 성은 억압된다는 시나리오는 결국 우리의 편견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편견은 가부장적인 책임과 부담에서는 벗어나고 싶지만 남성으로서 권한과 혜택은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이중의식에 의해 지속·강화된다. 오늘날 남성들의 “여성의 직장생활은 찬성하지만 가정생활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해야 한다”, “여성 할당제는 찬성하지만 내 상사가 여자인 건 싫다”는 식의 젠더 의식은 다분히 과도기적이며 극복되어야 할 모순이다. 우리사회의 보수적 성역할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작업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여성들은 가정과 감정노동 외의 영역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주체적인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며, 남성들의 경우 전통적 남성다움의 굴레를 벗고 그동안 여성들에게만 맡겨온 정서적·관계적으로 해방된 인간성을 온전히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모두 win-win하는 관계를 위해 우리가 깨야 할 것은 결국 이 사회의 틀이다.
◎ 글 : 조중헌 (한양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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